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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텔 <파이 이야기> 줄거리 및 독후감취미/책 2019. 2. 5. 18:29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게 아닌가요?"
- <파이 이야기>
세상에. 오랜만에 대단한 책을 읽었다. 멍청한 나는 작가의 손아귀에 완전히 놀아나고 말았다. 인터넷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에 갈때마다 베스트셀러에 꽂혀있던 파이이야기.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빛나는 타이틀에 번역가도 공경희씨. 표지는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있는 배한척. 안에는 잔뜩 웅크린 소년과 호랑이 한마리가 있다. 일러스트가 포함된 책을 보니 우화인 듯 했다.
주변에서 재밌다는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선뜻 그 책을 집어들 수 없었던건 내가 만화책과 일반 판타지 소설책의 두께에 적응해버려.. 파이이야기가 두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큰맘 먹고 읽게된 파이 이야기. 희안하게도 작가노트가 맨 앞장에 달려있다. 보통은 맨 뒷장에 역자후기와 함께 실리는데 말이다.
작가노트의 내용은 작가가 소재를 찾아다니던 중 한 노인에게서 굉장한 이야기를 들었고, 몇몇 일본인의 도움으로 이렇게 책을 쓰게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본문이 시작한다. 총 3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1장은 주인공 '피신 몰리토 파텔'가 인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이야기이다. 수영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하며, 피싱(똥싸다)이라는 별명이 싫어 스스로 '파이-참고로 원주율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는 주인공. 1장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역시 파이가 흰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모두 믿다가 낭패(?)를 본 이야기다.
파이는 우연히 들어간 교회에서 성경에 대해 배우게 된다. 신부님은 열심히 파이에게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강조한다. 하지만 파이는 "잘못은 인간이 했는데 왜 신의 아들인 예수가 죄를 받느냐"는 의문을 갖는다. 귀엽게도 파이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피신, 오늘 사자 한마리가 낙타를 두마리 죽였다. 어제는 검은 수사슴을 죽였어. 지난주엔 황새와 왜가리가 당했다. 더는 참을 수 없구나. 나는 사자가 속죄할 유일한 길은 너를 사자 밥으로 주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 "네 아버지 그게 옳고 합당해요. 저한테 몸 씻을 시간을 주세요."
이게 어찌나 우습고 파이가 귀여운지. 파이는 그 뒤로도 예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지만 곧이어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기독교인이 된다. 흰두교와 이슬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이는 단지 신이 좋아서 모든 신께 기도를 드렸다. 이를 본 3교의 현자(파이의 표현에 의하면.)들은 서로를 헐뜯고 싸운다. 그렇게나 사랑을 강조하던 신부는 다른 두 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이슬람교, 흰두교쪽 현자도 마찬가지다. 결국 진정으로 신을 믿은 것은 자기만족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이 현인들이 아니라 파이였다.
요즘 교인들은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속에 서 신앙을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장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에서 나온 아주머니들은 길거리 곳곳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 간디가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세 현인을 보니 문득 왜곡된 선교활동을 하는 기독교인이 생각났다. 파이는 세 현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파이의 믿음은 2장에서 그가 태평양을 탈출할 수 있게 희망을 준다.
2장의 내용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다. 1장은 약간 지루한 감이 있어서 꽤나 고전했다. 책을 덮을까 하는 생각도 정말 많이 했지만 언젠가 봤던 일러스트의 호랑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표지에도 있는 그 호랑이의 정체가 궁금해 결국 2장까지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동물원을 경영하던 파이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된다. 일본 화물선에 올라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화물선이 침몰해 가족 모두가 죽게된다.
구명보트에 남겨진것은 파이, 벵골호랑이(리처드 파커), 오랑우탄,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하이에나. 얼룩말을 제외한 모두가 하나같이 위험한 동물들이다. 리처드 파커는 파이가 물에 빠진 그를 구해내서 남게 된 동물이다. 나중엔 후회하게 되지만.
우선 하이에나가 다친 얼룩말을 잡아먹는다. 다만 아주 신중히 며칠을 참았다가 게걸스레 먹어치운다. 오랑우탄과는 몇번의 다툼 후 냉전에 돌입한것 같았다. 하지만 곧 오랑우탄도 잡아먹게 된다.
파이는 이 하이에나에게 잡아 먹힐것이라 생각한다. 태평양 망망대해에 야생동물과 남겨진 공포와 공허함으로 스스로 하이에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그의 눈엔 자신의 바로 아래칸에 있던 리처드 파커가 보인다. 시야에서 없어져 호랑이가 물에 다시 빠졌을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는 파이 바로 아래 구석진 곳에 앉아있었다. 하이에나는 이 사나운 짐승때문에 파이곁에 가지 못한다. 며칠이 지나고 리처드 파커는 하이에나를 조용히 잡아먹는다.
구명보트엔 파이와 리처드 파커 둘뿐. 그렇게 둘만의 태평양 표류기가 시작된다. 동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어렵게 길들인다. 하지만 언제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조심하고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 했다. 스스로 물과 먹을것을 조달하고 리처드 파커에게 나눠준다. 그렇게 지내다 표류된 프랑스인을 만난다. 프랑스인은 파이를 자신의 보트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리처드 파커의 영역을 침범하는 바람에 그의 먹이가 된다.
그의 인육을 먹은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약간 기운을 차리고 한 신비한 섬에 도착한다. 미어캣만 사는 해초섬. 민물 연못의 죽은 물고기가 있다. 바다 물고기가 해초를 먹다 민물로 들어와 죽은 것이다. 파이는 해초와 죽은 물고기로 완전히 기운을 차린다.
리처드 파커도 미어캣으로 예전의 늠름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넓은 땅을 놔두고도 그는 굳이 구명보트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파이는 해초섬의 나무위에서 자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연못 가득했던 물고기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섬을 둘러본다.
섬 가운데는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고 그 열매를 까보니 인간의 이빨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해초섬은 나무위쪽을 제외하고 모두 산성화된다. 식충섬의 존재를 알게된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태우고 다시 표류하게 된다. 하지만 곧 캐나다에 도착하게 되고 구조된다는 내용이다.
프랑스인 표류자와 식충섬은 허구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겼다. 앞부분의 작가노트때문에 나는 실제로 파이라는 인물이 벵골호랑이와 277일이라는 긴 기간을 버텼는줄 알았다. 하지만 뒷부분의 그 어이없는 이야기들은 이걸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참 난감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3장은 파이가 구조된 후 일본 화물선의 침몰 원인을 밝히려 조사를 온 두명의 일본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들은 파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호랑이와 함께 살다니. 식충섬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요구했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게 아닌가요?"
파이는 이렇게 말하며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현실의 이야기를 한다. 하이에나는 잔인한 프랑스 요리사였고 오랑우탄은 그의 어머니였으며 리처드파커는 파이 자신이었다. 얼룩말은 선원이다. 프랑스 요리사는 상처가 심해지고 있다며 선원의 다리를 자른다. 하지만 이는 낚시용 미끼로 쓰기위한 것이 밝혀진다. 이에 분노한 파이의 어미니와 요리사는 크게 다툰다. 얼마 후 선원은 죽고 요리사는 그의 살을 토막내어 식량으로 사용한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파이와 어머니는 인육만큼은 먹기를 거부했다. 선원의 시체로 낚은 물고기만 먹었는데, 요리사의 잔혹함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로 먹거리를 제공하는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났다. 한동안 셋은 잘 지냈다. 그러다 어느날 바다거북을 잡다 놓쳐버린 파이에게 요리사가 폭력을 행사한다.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를 뗏목에 던져놓고 요리사와 싸우다 살해당한다. 요리사는 그녀의 머리를 파이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를 살려두었다. 그리고 복수의 기회라도 주는듯 식칼을 항상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파이는 요리사를 살해한다. 그리고 시체를 게걸스레 먹어버린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앞에서 일본인이 믿지 않은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파이는 끔찍한 현실을 들려주고 되묻는다.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좋은지 현실적인 이야기가 좋은지. 역시 동물쪽이 좋다고 말하는 일본인에게 파이는 눈물을 흘리며 신께서도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진실임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허구일 것이다. 작가노트까지 허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속 여러 정황과 기적같은 일은 철저하게 잘 짜여진 각본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실제라고 믿고 싶다. 사나운 벵골호랑이와 태평양에 표류하게 된 끔찍한 절망속에서 파이가 꿋꿋히 살아온 그 여정을. 절망과 공포였던 리처드 파커가 파이에게 얼마나 의미있는 존재였는지 회고하는 장면은 눈물이 울컥했다. 한줌의 희망도 없는 항해에서 리처드 파커는 파이의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게 해주었고 위험하지만 유일한 동료였다. 삶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순간에 파이는 이 위험천만한 고양이과 짐승이 자신을 살아갈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였음을 깨닫는다. 그를 길들이고 지배해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277일을 버틴 것이다.
절망은 우리 인생에서 계속해서 찾아온다. 그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간에 누구에게나 절망의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리처드 파커라는 절망을 이겨낸 파이. 그의 시련속에서 나는 용기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나이트 샤말란이 영화화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소설. 단순히 인생에 대한 우화로 끝났으면 이렇게까지 독자들을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앞부분의 작가노트를 읽은 사람은 이것이 실제 이야기를 픽션으로 재구성 한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또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겨우 이렇게 독후감을 쓰고 줄거리를 다시 짚으면서 이것이 잘 짜여진 이야기라는걸 깨달았다.
곳곳에 상징적 의미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물론 처음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때는 구명보트에서 일어난 비극에 굉장한 쇼크를 받았다. 대반전이었달까. 식충섬의 이야기는 파이가 지어낸 것이라고 치면 모든것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로 대단한 책이다. 독자가 책을 완성시킨다는 작가의 말을 그대로 실현해보인 작가분이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내 추천도서 목록에 랭킹!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
p.s.신을 향한 믿음이 책 속에서 강조되어 있다. 하지만 무교인 나로써는 도저히 동감할 수가 없었다.
영화도 나온 명작중의 명작 소설. 호랑이가 표류중인 동화같은 표지도 굉장히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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